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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산다는 것에 관하여

킨더리베 2017-03-02 18:36:16 조회수 2,484

                       

                                                   

혼자서 밥 먹고, 혼자서 놀고, 혼자서 고민하는 ‘나홀로족’이 점점 늘어난다. 집 안에 갇혀 혼자서 아이를 키우는 ‘독박육아’로 외로움을 호소하는 부모도 많다. 사람은 혼자서는 살 수 없다고 하던데, 함께 살아야 한다고 하던데, 왜인지 사람들은 점점 더 ‘혼자’가 되어간다. 왜 우리는 함께 살아야 하며, 함께 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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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밥’ ‘혼술’ ‘1인 가구’ 등 각자도생이 메가트렌드인 시대입니다. 과거에 비해 공동체보다 개인이 우선시되고 사회가 점점 1인 체재로 변화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한국 사회가 후기 산업사회로 들어서면서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시대 변화입니다. 극도의 소비사회에서 사람은 개별화될 수밖에 없어요. 개개인의 삶을 자본화시키려면 사람이 인간관계가 아닌 자본에 의지해 살아가도록 만들어야 하거든요. 또 어떤 의미에서는 인류의 오랜 꿈이 이뤄진 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자신만의 공간과 시간을 가지는 것은 인류의 오랜 소망이었잖아요. 과거에는 불가능했던 일이 지금은 가능해진 거죠.

반면 공동육아와 마을공동체, 협동조합처럼 공동체적인 삶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는 사람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는 어떤 의미인가요?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좋은 점이 있으면 나쁜 점이 있기 마련이죠.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 그토록 바라던 것들을 누리게 되니까 동시에 당연히 누렸던 것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가족, 친구, 이웃, 마을, 공동체. 지금은 개별화된 삶을 누리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있었던 것들을 여전히 누리고 있기도 하고, 부분적으로만 개별화되어 아직은 그 심각성이나 문제점을 모르고 지내는 분들이 많아요. 하지만 개별화되면 개별화될수록 공동체적인 관계와 지지를 절실하게 원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질 겁니다. 인간은 혼자서 살 수가 없거든요. 

어째서 인간은 혼자서 살 수 없는 건가요?
인간이 온전히 혼자만의 시간과 공간에서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시간은 생의 과정 전체로 봤을 때 극히 일부분에 불과합니다. 인간은 본래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의존적인 동물로 태어났거든요. 아이가 어른이 돼 사회로 나가기까지도 거의 20여 년에 가까운 일방적인 투자와 보호가 필요하잖아요. 늙어가고 죽는 과정에서도 다른 이의 도움과 보살핌이 필요하죠. 사람들이 혼자서도 행복하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해요. 그리고 그 착각은 그리 오래 유지되지도 못합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소외와 고립 속에서 외로움, 슬픔, 불행을 느끼게 되죠. 그러다 보니 안타깝게도 사람들이 더 돈에 의지하게 되는 겁니다. 믿을 게 돈밖에 없으니까. 아이를 키우는 일도, 노년을 보내는 것도, 생을 마무리하는 것까지 모든 일을 상업화된 서비스에 맡겨야 하니까요. 하지만 돈으로는 이 외로움과 고통을 해결할 수가 없어요. 

오래전부터 공동체 정신을 살리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오셨습니다. 특히 해송유아원, 해송아기둥지, 우리어린이집 등을 통해 수많은 아이들을 공동육아로 성장시켰고 지금도 ‘공동육아와 공동체교육’의 공동대표로 활동하며 공동육아에 앞장서고 있는데 이유가 있나요?

공동육아란 남의 아이를 잠시 봐준다거나, 내 아이를 어디에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함께 우리의 아이들을 같이 키우고 돌보자’는 뜻이에요. 이를 강조하는 것은 지금의 사회가 부모 홀로 아이를 키울 수 없는 환경인 동시에 부모들의 노력 없이는 아이들이 고립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 때문입니다. 과거와 지금의 사회적 조건과 환경은 완전히 달라졌어요. 1960년대에 평균 자녀 수는 6.5명 정도였습니다. 형제가 10명이 넘는 집들도 많았죠. 형제만 많은 게 아니라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 사는 대가족도 흔했고, 동네에 친척들이 모여 사는 경우도 있었어요. 생각해보면 아이를 키운 건 부모가 아닌 아이들이었습니다. 과거에도 부모들은 농사를 짓거나, 밥벌이, 살림을 하기에 바빴거든요. 그럼 누나가, 오빠가 동생들을 키웠죠. 친척과 이웃들의 도움도 있었고요. 하지만 요즘에는 집마다 겨우 한두 명의 아이만 있을 뿐이죠. 그렇다고 친척들과 모여 사는 것도, 가까운 이웃이 있는 것도 아니고요. 아이들을 돌봐주는 이도 없지만, 아이들과 함께 놀 친구도 없어요. 수천 가구가 함께 살아가는데도 옆집에 누가 사는지 모르는 고립된 아파트형 공간에서 살고, 아이들이 자유롭게 뛰어놀고 친구를 만날 수 있었던 공터나 골목은 사라졌으니까요. 과거를 되돌아보면 아이들은 동네에서 자랐어요.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서요. 저녁 무렵이면 각 집에서 아이들을 불러모으는 소리로 시끌시끌했잖아요.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풍경이죠. 우리는 지금의 사회 변화를 인식하고 공동체의 결핍이 얼마나 심각한 건지 인지해야 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풍요로운 환경에서 산다고들 하는데 그것은 단지 물질적인 것에 한정돼 있어요.





사람들이 혼자서도 행복하고 멋지게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해요.
사람들은 소외와 고립 속에서
외로움, 슬픔, 불행을 느끼게 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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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하고, 공동체 경험을 가져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갈 수 없는 개인은 다른 무엇도 할 수가 없습니다. 자발적 사회성이라고 하는 것은 미래에 가장 중요한 덕목이에요. 개인의 지식과 기술, 능력 이상으로 중요한 것이 다른 사람들과 협업하고 협상할 줄 아는 것이며 친구와 동지를 만드는 것입니다. 더구나 옛날처럼 학연, 지연, 혈연에 제한된 인간관계에서 사는 게 아니라 글로벌한 세상에서 사는 아이들에게는 더없이 중요하죠. 인터넷 속에서 한두 번 소통하고도 친밀감을 느끼는 관계로 발전시켜야 하며, 함께 기능적으로 결합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어릴 때 공동체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그저 주어진 상황에서 주어진 미션만 반복해본 아이들이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2000년대 이후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만 봐도 이미 협동해 일을 해나가는 능력이 현저히 부족하고, 자발적인 호기심과 스스로 하려고 하는 의지가 없는 경우가 많아요. 이는 부모들이 아이들을 제한된 공간 안에서 부모의 기획과 프로그램에 맞춰 키웠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다양한 사람들과 부딪히면서 스스로 탐색하고 실험하며 자기만의 세상을 구축해나가야 해요. 사람들과의 관계가 부재한 협소한 울타리 안에서 그저 부모가 시키는 대로 인생을 살아온 아이들이 사회성과 자발적인 의지가 부족한 것은 당연하죠.

공동체 경험의 부재로 자발적 의지가 없는 아이들은 어떤 문제가 있을까요?
부모가 하라는 대로 공부를 해서 대학도 가고 취업을 했는데도 행복하지 않다는 겁니다. 또 혼자서는 미래를 그려본 적도, 계획을 해본 적도 없는 이들은 취업 후 남은 70년을 바라보며 암담해지죠. 적어도 100년을 산다고 하는데 이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모르는 거예요. 부모에게 배운 거라고는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는 것과 취업하는 것뿐이었거든요. 그 뒷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죠. 또 우리는 사람이 사회적으로 일할 수 있을 때에만 가치 있는 존재라고 인식하도록 세뇌당했는데, 20대 중반에 취업해 오래 일해도 60세 정도에는 일을 그만둬야 하잖아요. 아직도 남은 인생이 40년. 노년을 살아갈 방법도 모르고, 문제를 해결할 의지도 없는 거죠.
그런데 요즘 대학에 입학한 아이들이 뭔가 잘못됐다는 걸 깨닫기 시작했어요. 대학만 잘 가면, 취업만 잘 하면, 결혼만 잘 하면 행복할 거라고 했는데, 사실 인생이 그렇지 않잖아요? 부모들이 아이들을 속였던 거죠. 그게 기성세대에 대한 분노와 배신감, 증오로 표출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라는 대로 했는데 이게 뭐야!”라며 부모들에게 인생을 책임지라고 말하죠. 부모들은 무조건 교육만 시킬 것이 아니라 아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성찰해봐야 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나눔이나 배려, 공동체 정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경쟁적으로 교육시키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계속해서 산업화 시대의 고정관념과 상식에만 머물러 있기 때문입니다. 부모들이 자랐던 과거에는 사회관계가 풍성했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얻어지는 자발적 사회성이나 정서적 지능 등의 영역은 모두가 지니고 있던 시절이었죠. 그런 환경에서 중요한 것은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에 비해 경쟁력을 가지려면 어떤 투자를 해야 하느냐였어요. 지식과 정보, 능력을 쌓아 스스로를 자본화하고 산업화하는 일들이 중요했었죠. 지금 부모 세대는 그 시대를 거치며 한 발자국 앞선 사람들이 이 사회 안에서 어떻게 신분 상승을 했고, 어떤 특권을 누리고 있는가를 직접 눈으로 목격했어요. 불행히도 소수만이 그 혜택을 누렸고 대다수는 그저 멀리서 그 모습을 선망해야만 했죠. 이런 이들이 부모가 된 후 자신에게 부족했다고 느꼈던 것들을 아이들에게 쏟아 붓는 거예요. 하지만 이는 시대 착오적인 생각이에요. 지금의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IQ’가 아니라 ‘EQ’입니다. 이미 교육은 충분해요. 전 세계적으로 이렇게 아이들을 교육으로 혹사시키는 나라도 없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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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가 유난히 경쟁구조가 치열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우리나라는 세계에서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게 산업화·도시화된 나라입니다. 다른 나라들은 200년 걸린 산업화를 우리나라는 정말 순식간에 해치워버려요. 그런 의미에서 우리나라의 산업화는 매우 무자비했어요. 정치·사회적으로 사람들이 농촌을 떠나 도시에서 일을 해야만 살 수 있도록 만들었거든요. 최소한의 사회적 지원이나 복지를 마련하지도 않고 정책을 펼쳤죠. 사람들은 주위를 둘러볼 겨를은커녕 내 아이를 돌볼 여유도 없었어요. 밖에서 걸어 잠근 방에서 일 나간 부모들을 기다리던 혜영이와 용철이가 불에 타 죽은 사건은 우리의 산업화가 얼마나 삭막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반면 시간을 가지고 산업화된 이른바 선진 자본주의 국가에는 이웃의 개념과 함께 아이를 키우기 위한 사회공공적인 노력과 모색이 있었어요.


아이들이 사람들과 어울리며 살아가고, 사라져가는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는 일이 가능할까요?
이제 막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은 젊은 부부의 역할이 중요합니다. 개인으로서 경쟁하며 사는 일에만 급급했던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결혼은 함께 사는 삶의 시작이에요. 동시에 아이를 가지게 되면 이들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됩니다. 아이와 가족을 위해 중요한 결심을 하려는 의지가 생기고 고민을 시작해요. 삶의 방향과 라이프스타일을 바꿀 수 있는 기회인 거죠. 이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신중히 고민해봐야 해요. 그러나 지금까지의 관성에 따라 ‘아이를 위해서 지금보다 더 열심히 돈을 벌어야지’로 결론을 맺은 부모들이 많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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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한 마을공동체로 알려진 ‘성미산마을’과 ‘재미난마을’만 보더라도 부모들의 결심이 얼마나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지 알 수 있어요. 두 마을 모두 시작은 공동육아였으며, 여전히 많은 마을공동체 중심에는 공동육아와 어린이집이 있습니다.
성미산마을의 시작은 1994년 개원한 공동육아 방식으로 운영하던 ‘우리어린이집’입니다. 제가 교사로 있었던 곳이기도 하죠. 저희가 당시 부모들의 염려와 걱정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고집했던 것 중 하나가 있는데, 바로 아이들 등·하원 차량 사용을 금지하는 것이었어요. 부모들이 불편하고 피곤하더라도 매일 어린이집에 찾아오고, 아무리 급해도 음식 배달하듯 현관문 앞에서 아이를 주고받지 말자고 했죠. 등원할 때에는 부모들이 아이가 방으로 들어가 다른 아이들과 만나서 이야기하는 것을 보고 난 후 돌아가도록 했어요. 퇴근 후 아이를 데리고 갈 때에도  먼저 자신의 아이를 찾는 게 아니라, 처음 본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주고 마주친 모든 아이들의 눈을 봐준 후에 내 아이를 찾도록 했죠. 그렇게 부모가 다른 아이들과 부모, 교사와 시간을 보내고 접촉해야 비로소 깊은 우정과 신뢰, 연대의식이 생겨나게 됩니다. 그러면 간혹 회사가 늦게 끝나더라도, 급한 일이 생기더라도 아이를 믿고 맡길 수 있죠. 그렇게 등·하원 차량을 대신해 부모들이 어린이집을 6개월, 1년 정도 오가니까 나중에는 어린이집 근처로 이사를 오더라고요. 그 뒤로 부모들은 방과후 돌봄 교실, 대안학교, 식당 등 함께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들을 하나씩 만들기 시작했어요. 그렇게 생활공동체가 만들어지고 끈끈한 공동체 정신이 생겨나는 겁니다.

부모들이 먼저 공동체 정신을 회복하고 함께 살아가는 방법을 터득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사람들과 함께할 수 있는 것들을 적극적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엄마들이 모여 육아를 함께할 수도 있고, 지역 내 모임이나 생활 필수품, 의료, 예술 등 관심 있는 분야의 협동조합에 가입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독서, 운동 등 취미를 공유하는 것으로도 함께할 수 있죠. 아이와 함께하는 모임을 진행할 경우에는 아이들과 같이 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구성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많은 부모들이 모임에 가입하고 활동하지만 지속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중간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또 모임이나 공동체가 사라지는 경우도 잦고요.
그것 자체가 굉장히 중요한 경험이라고 생각합니다. 번거롭고 힘들다고 피하기 보다 부딪히고 어울리다 보면 분명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될 거예요. 한번 돈독한 관계를 형성한 사람들은 노년까지도 그 관계를 이어가더라고요. 저와 함께 1994년 공동육아 시설인 ‘우리어린이집’을 함께 이끌며 아이를 키웠던 조합원들은 지금 1차 경력이 끝나는 시점인 50대 중·후반의 사람들인데, 이제 아이들을 함께 키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노년을 보내기 위해서 공동체를 만들어 살고 있습니다.
 
아이들에게 더불어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치고 공동체 정신을 길러주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먼저 아이들에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줘야 합니다. 요즘은 그런 공간을 찾는 것도 어려운 일이니까요. 하지만 단순히 아이들을 어린이집, 유치원, 놀이방으로 보내는 것으로만 끝나서는 안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지만, 서로가 서로를 경쟁 상대로 여기고 몇 년을 함께 지내도 같은 공간에 누가 있는지조차 모른다면 그건 진짜 의미에서의 ‘함께’가 아니니까요. 아이들이 모여만 있는 게 아니라 실제로 어울리고 생활할 수 있는 조건을 만들어줘야 해요. 특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이 일상에서 벽을 허물고 친구들과, 다른 사람들과 생활할 수 있도록 부모와 사회가 힘을 합쳐야 해요.

아이들이 상호관계를 맺고 자유롭게 소통하는 환경이란 무엇인가요? 또 이런 환경을 만들어주기 위해서 부모는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 건가요?

아이들을 모아 앉혀두고 일방적으로 교육하는 시스템이 아닌 햇빛, 바람, 물, 흙 그리고 온갖 생명들과 어우러져 직접 보고 듣고 만지고 맛보는 체험 중심의 생활을 뜻합니다. 아이들이 이런저런 일들을 꾸며보고 저질러볼 수 있는 자유로운 환경이 돼야 해요. 또 나들이를 생활화해 자꾸 밖으로, 밖으로 나가야 합니다. 집이나 어린이집, 유치원에서만 사회를 배우는 게 아니라 직접 시장도 가보고 경찰서도 가보는 거죠. 자연환경만큼이나 사회환경을 이용하고 아이들이 또래뿐만 아니라 다양한 연령대의 사람들과 소통해보는 기회를 제공해줘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부모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으신가요?
‘우리어린이집’ 개원 15주년 잔치 때였을 거예요. 잔치가 끝났는데도 아직 끝나지 않았다며 사람들이 모여 찾아간 곳이 있었어요. 그날 마침 감기에 걸려 잔치에 오지 못한 장애아 친구의 집이었죠. 이제는 다 성장해 대학에 입학한 친구들이 어린 시절을 형제처럼, 형제로서 자란 친구를 만나러 간 거였죠. 중도장애를 가진 그 아이는 언어 소통이 힘들었어요. 대신 어린 시절을 함께 보낸 친구들을 만났을 때의 기쁨과 반가움을 온몸으로 확실히 표현하더라고요. 그때 아이들의 모습을 보며 참 많이 뿌듯했습니다. 이런 것이야말로 인생을 함께 살아가는 보람이 아닐까요?


에디터 윤경민  포토그래퍼 강봉형·유재철  모델 최시연·전서준  의상 협찬 더캐시미어, 세인트제임스, 모이몰른, 리틀그라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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