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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아야 산다!

킨더리베 2016-08-30 19:01:13 조회수 1,093

                       

                                                   

현병호  에디터 박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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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 아이들은 놀면서 자랐다. 70년대만 해도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따로 필요치 않았다. 골목이든 운동장이든 강가든 아이들이 모이는 곳이 곧 놀이터였다. 그 시절 아이들에게 운동장은 교실보다 훨씬 좋은 교육 공간이었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아이들은 쉬는 시간이면 운동장으로 뛰어나가 1분 1초가 아깝도록 뛰어놀았다. 


학교 운동장에서, 골목에서 해 지는 줄 모르고 놀았던 힘으로 근대화의 고단한 시절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근대화의 결과, 곳곳에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골목길이 사라지고 차들이 길을 점령하면서 아이들은 골목을 떠나 학원으로 향하게 됐다. 학원을 뺑뺑이 도느라 방과 후에도 제대로 뛰어놀 수 없게 된 아이들에게 학교 운동장은 더 이상 노는 공간이 아니다. 너무 일찍부터 부모와 또 친구와 멀어지고 대신 텔레비전과 더 가까워진 아이들, 골목과 놀이친구를 잃어버린 대신 학원에서 방과 후를 보내는 아이들은 더 이상 몸을 놀려 놀지 않는다. 


놀지 않는 것은 아이들뿐만이 아니다. 우리 사회 어디서나 어른들의 놀이문화는 비슷하다. 술집 아니면 노래방, 거기에 고스톱과 내기 골프 정도를 추가할 수 있을까. 최근 직장인 밴드가 유행하고 여러 동호회들이 생겨나는 걸 보면 그래도 놀이에 목마른 어른들이 나름의 살길을 찾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런 이들의 면면을 유심히 살펴보면, 어릴 때 조금이라도 놀아본 사람들이 많다. 공부하는 틈틈이 기타 줄이라도 튕겨본 이들이다. 


놀이는 무엇보다 여럿이 함께 어울리는 데서 생겨난다. 혼자 할 수 있는 놀이도 있지만, 여럿이 어울려 하는 놀이만큼 재미난 것도 드물다. 춤추고 노래하는 것도 여럿이 어울려야 제맛이 난다. 영화 <써니>에서 소녀들이 함께 어울리며 신나게 놀지 않았다면, 그처럼 빛나는 시절을 보낼 수 있었을까? 특별한 놀이가 없어도 그저 친구들끼리 어울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재미나게 놀 수 있다. 


놀지 않고 공부만 한 모범생들은 어른이 돼서도 놀 줄을 모른다. 기껏해야 책이나 보고 음악을 듣거나 영화관을 찾는 정도다. 최근 등산 바람이 불면서 아웃도어 시장이 달아오른 것도 어린 시절을 자연과 친숙하게 보냈던 세대가 먹고 살만해지면서 다시금 자연에 눈을 뜨며 생겨난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여성들의 경우 문화센터를 찾는 것이 나름의 놀 거리를 찾는 길이 되고 있다. 춤과 노래, 시와 그림 같은 모든 문화, 예술은 사실상 놀이본능의 산물이다. 


놀이 본능은 사람들의 유전자 속에 타고날 때부터 내재되어 있다. 어쩌면 모든 동물들이 타고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집에서 키우는 개나 고양이 새끼들을 관찰해보면 잠잘 때 말고는 한시도 쉬지 않고 몸을 움직인다. 먹고 자고 뒹굴면서 장난치는 것이 새끼들의 삶이다. 그렇게 뒹굴면서 자연스럽게 신체가 발달하고 삶의 에너지를 충전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한 번은 레스토랑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동안 대기실 옆 놀이방을 들여다보니 공이 가득한 볼풀에서 아이들이 깔깔거리고 있었다. 수영 선수 박태환이 한창 인기를 끌 때였다. 누나뻘인 아이는 수영 경기 중계를 하고 두 남자아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볼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마냥 웃고 있었다. 도시에서도 이처럼 아이들은 작은 틈새를 비집고서 논다. 같이 놀 동무가 있고 시간만 주어지면 언제 어디서든 놀이를 만들어낼 줄 안다. 


아이들은 이렇게 어울려 놀면서 진짜 중요한 ‘삶의 기술’을 배운다. 삶과 놀이는 원래 죽음을 전제로 한다. 아이들은 죽어도 곧 새로운 판에서 다시 살아날 것을 알기에 마음 놓고 놀이에 뛰어든다. 놀이 속에서 삶과 죽음의 경계를 수시로 넘나들면서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다시 도전하고, 새롭게 시작하는 힘을 기르는 셈이다. 또 친구들과 놀이를 통해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자기 자리를 찾는 노하우를 터득하기도 한다. 


예전 놀이판에는 ‘깍두기’라는 룰이 있었다. 놀이에 서툰 어린 동생이나 친구를 이쪽 편과 저쪽 편에 다 낄 수 있게 배려한 것이다. 깍두기인 아이는 그렇게 두 배로 놀면서 놀이 기술을 익힐 수 있었다. 이는 놀이판에서 누구도 소외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이기도 했지만 양편의 전력을 균등하게 만들기 위한 장치이기도 했다. 아이들 스스로 고안해낸 지혜였다. 이기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다 함께 재미있게 노는 것이 목적임을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이다.


놀이본능을 일깨우는 길은 우정을 일깨우는 길로 통한다. 하지만 서로를 밟고 올라서도록 부추기는 경쟁 문화에서 건강한 놀이문화를 꽃피우기는 어렵다. 진정으로 아이들의 삶을 염려한다면 아이들에게 놀 시간과 놀이 동무를 돌려줘야 한다. 창의경제를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다운 삶을 위해 그래야 한다. 그저 친구들과 어울려 놀면서 뭔가를 작당하고 만들어내는 그 에너지가 문화가 되고, 예술이 되고, 우리들의 삶을 구원할 것이다. 이 선순환의 고리를 놓쳐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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